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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런던에서 야파까지 (2)

1장 런던에서 야파까지(2)


검역선(The Quarantine Boat).
검역관을 태운 검역선이 우리 배 옆으로 왔다. 그때 우리는 선원들이 가지고 온 바구니에서 오렌지와 살구, 그리고 레몬을 받아 맛보고 있었다. 누군가 아직 번들거리는 잎사귀 여러 개가 붙은 멋들어진 가지 하나를 주었는데, 거기에는 잘 익은 오렌지가 달려 있었다. 산들바람은 상쾌했지만, 파도가 거칠어 해안까지 타고갈 작은 검역선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리를 안전하게 항구까지 데려다 줄 예인선이 왔지만, 아랍 선원들은 다가오는 검역선을 보고는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섣불리 배를 건드렸다가 검역소에 수감되는 것이 무서워 배에 손을 대지 못했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우리는 결국 여러 번 시도한 끝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두 수사(修士)와 함께 짐을 가지고 꼴사나운 모습으로 예인선에 내려섰다. 바다로 떨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1939년 Parita 호가 텔아비브 해안에 사람을 내리는 장면

승객을 태운 예인선은 곧 테이지 호에서 떨어져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갔다. 작은 예인선이 파도 골짜기에 들어갈 때는 파도에 파묻힐 것 같았지만, 이내 파도를 타고 튀어올라 그 파도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배는 항구를 가로막고 있는 바위 지대로 접근했다. 나는 배가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날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거친 파도에 쉼없이 흔들리고 있는 작은 이 배가 앞에 늘어선 바위를 피해 항구로 안전하게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바위 지대 사이에 난 좁은 뱃길을 통과하는 동안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위 지대를 무사히 통과해 들어가니 바닷물은 호수처럼 평온했다. 비로소 주위의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경탄했다. 바위 지대를 피해 항구로 들어가는 길은 두 군데가 있었다. 하나는 북쪽을 향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서쪽으로 나 있었다. 우리는 서쪽에서 항구로 들어가는 통로를 택했다. 나는 배 밑창이 바위에 긁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에 상륙하다(Landing in Palestine).
8시 반이었다. 선창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대부분 화려한 원주민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머리에서 발끝까지 흰 흔한 레반트(Levantine) 옷을 입은 서유럽인들도 몇 명 있었다. 선박들뿐만 아니라 영사관과 수도회들도 합세해서 수많은 깃발들의 행렬에 동참했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항구는 제법 휴일 분위기가 났다.

검역소(The Quarantine Station)
우리는 마을 앞을 통과하여 남쪽 성벽 부근에 있는 검역소로 갔다. 그 건물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동생은 해안에서 아랍어, 이태리어,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로 환영하는 인사말을 들었다. 우리가 탄 배는 검역소 앞 모래사장에 정박했다. 조잡한 셔츠와 허리띠를 두른 검역관(garde de santé: 이 검역관은 아마도 검역소에서 고용한 하인으로 보인다)은 무릎깊이까지 오는 물에 뛰어들더니, 힘센 팔로 나를 안고 첨벙거리며 비디와 모래사장을 통과해 달렸다. 이미 발 밑은 뭍이었지만, 그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그가 달린 이유는 숙녀를 오래 안고 있는 것이 예절에 어긋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검역소로 들어가는 거친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던 다른 검역관 앞에 나를 내려놓고는, 다시 배에 있는 여행객들을 데려오기 위해 서둘러 돌아갔다. 그는 그렇게 한 사람씩 단단한 땅(terra firma)으로 데리고 왔다.
나는 전부터 팔레스타인에 처음 도착할 때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위태로운 바위 사이를 지나 단단한 땅에 일 때까지 벌어진 정신없는 사건들로 인해서 그런 낭만을 즐길 새가 없었다. 심지어 검역소에서 갇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지금 내가 거룩한 곳(the Holy Land: 거룩한 땅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종교적 유적지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을 가리켜 사용하기도 한다. 개역개정판은 ‘거룩한 곳’(렘 31:40))에 와 있다는 감격적인 사실도 거의 잊게 만들었다. 
동생과 프란체스코 수사들이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문이 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넓은 공터였는데, 그 주위로 황폐하다고 말해도 좋을 무척 낡은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건물들은 낮았고 지붕이 평평했다. 광장 중앙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나무로 만든 헛간 같은 것이 입구를 덮고 있었다( 이 우물 덮개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것 같다. 우물의 오염을 방지하는 것과 더운 날씨에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팔레스타인의 건기는 대단히 건조하다). 그 주위에는 큰 잎사귀들로 무성한 키 큰 뽕나무들(mulberry-trees)이 좋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발생한 콜레라 때문에 보통 한산했을 검역소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와 함께 들어온 프란체스코 수사들은 성지 순례객들이 있는 방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여덟 명이 한 방에 묵었다.
비어있던 유일한 방은 작은 안뜰로 문이 나있는 광장 왼쪽 구석에 있는 방이었는데, 그것이 우리 몫이었다. 그 방은 결코 유쾌한 숙박시설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방은 약 12피트(3.6m)의 정방형이었다. 바닥은 돌이었고, 벽은 회반죽으로 칠해져 있었다. 거친 판자로 만들어진 문 안쪽에는 빗장이 없어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절반이 유리로 되어있는 여닫이 창문은 북쪽으로 나있었다. 그 창을 통해서 푸른 바다, 바위 해안, 그리고 여기저기에 솟아있는 뾰족탑과 야자수가 보였다. 그리고 평평한 지붕 위로 또 다른 집이 차례로 올라선 것처럼 보이는 집들이 다닥다닥한 야파(Yâfa) 마을이 보였다. 몇 무리의 아이들이 검역소 근처에 있는 나무 그늘 밑에서 놀고 있었다. 검역소 내부는 황량하기 말할 데 없었지만, 창문으로 보이는 외부의 이국적인 경치는 황량함을 보상하기에 충분했다. 
1900년대에 촬영한 야파 전경

방 안에는 우리의 짐과 긴 지팡이를 가진 검역관, 수많은 파리들, 개미집들, 그리고 우리뿐이었다. 나는 좁은 창가에 앉았고, 동생은 커다란 여행용 가방과 상자들 위에 몸을 던졌다. 그렇게 쉬다가 우리 둘은 눈을 마주쳤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만약 건강이 좋지 않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심각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동생은 그곳에서 낯선 사람이 아니어서 도와줄 사람이 가까이 있었다. 영국 영사 카야트 씨(Mr. Kayat)―그는 시리아(Syria) 출신이었다―가 그의 통역원을 보냈다. 그 통역원은 우리에게 올 때 매트감(matting)과 매트리스들(mattresses), 그리고 솜을 넣어 누빈 이불을 가져왔고, 우리는 즉석에서 그것들로 소파를 만들었다.
그후 예루살렘에 있던 우리의 친절한 친구 그라함 씨(Mr. Graham)가 우리를 보러 왔다. 그는 우리를 감시하는 검역관을 마주보고 창문 밖에 서 있었다. 만약 그라함 씨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방으로 들어와 악수하고 포옹했다면, 그도 우리와 함께 이 방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텐트와 가구, 그리고 요리 도구 등을 빌려주었다. 덕분에 말할 수 없이 불편한 검역소에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검역소는 질병의 여부가 확인될 때까지 구금한다는 것에서 구치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검역소에서는 따로 먹을 것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각기 알아서 자기 먹을 것을 구했다. 우리는 주머니에서 꺼낸 돈을 물 컵에 넣은 후에 심부름 할 아이에게 건넸다. 혹시 우리에게 있을지 모를 전염병균을 씻기 위한 방편이었다. 내가 보기에 우리 돈을 받고 시장으로 간 더럽고 작은 반나체의 심부름꾼들보다 우리가 더 위생적인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들의 도움으로 닭고기, 염소젖, 커피, 쌀, 과일, 그리고 여러 야채를 적당한 값으로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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